[번역 인용]〈객체지향 존재론〉 최단 입문 01 : 객체란 무엇인가

*이 글은 이이모리 모토아키(飯盛元章) 씨의 〈オブジェクト指向存在論〉最速入門01:対象とは?를 번역한 것이며, 원문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객체지향 존재론> 최단 입문 01: 객체란?
이 세계의 온갖 사물은 다른 사물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그것일 따름이다. 이것이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의 객체지향 존재론에서 토대를 이루는 발상이다.
하먼은 “사변적 실재론”과 “객체지향 존재론” 같은 21세기의 새로운 철학적 조류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철학자로, 20세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연구에서 출발해 객체지향 존재론이라는 독자적인 철학적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하먼의 이러한 입장은 오늘날에는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건축 등의 분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시리즈는 철학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이도 읽을 수 있도록 객체지향 존재론의 사고방식을 해설한 입문 시리즈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대상은 현대의 최전선에 있는 형이상학 이론이다. 때로는 note(원문이 등록된 사이트명)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고도로 추상적이고 일상과 동떨어진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애초에 형이상학이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에 공통된 일반적 특징을 그려내려는 시도이다. 그러한 시도에 추상적 개념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서 어떻게든 이해하기 쉽게 쓰고자 한다.
이번에는 객체지향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을 살펴보자.
목차
1, 일상의 세계는 객체로 넘쳐흐르고 있다
2. 객체는 다른 것으로 치환되고 만다
3. 객체는 파괴될 수 있다
4. 객체는 관계에서 물러나 있다
1. 일상의 세계는 객체로 넘쳐흐르고 있다
객체지향 존재론이란 개별 객체(즉, 대상object)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철학적 입장이다.
애초에 일상의 세계에는 다양한 객체가 넘쳐흐르고 있다. 아이폰과 머그잔, 고양이, 주식회사, 힉스 입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당신 자신까지… 다양한 크기, 다양한 유형의 객체가 무수히 존재한다.
이 모든 객체를 고스란히 철학적 이론 안에 담아내자는 것이 객체지향 존재론이 지향하는 바이다.
이 세계에는 말 그대로 고유한, 개성의 집합체인 객체가 다양한 크기의 계층에 무수히 존재한다. 반짝반짝 빛나며 매력적인 빛을 발하는 보석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이 보석은 '보석이다'라는 점에서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객체지향 존재론은 보석과 같은 모든 객체를 전부 동등하고 궁극적인 것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런데 철학의 역사에서 객체는 종종 다른 것으로 치환되어 왔다. 철학적 설명이 이루어질 때, 객체는 언제나 궁극적인 것이라는 지위에서 쫓겨나곤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2. 객체는 다른 것으로 치환되고 만다
많은 철학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객체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너무 소박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객체를 좀 더 세련된 다른 무언가로 치환함으로써 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조작을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환원'이라고 부른다. 하먼에 따르면, 객체를 환원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방법은 “객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고 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객체를 그 원인(구성요소 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하먼은 이 전략을 “아래로-환원”(下方解体, undermining)이라고 명명한다. 아래로-환원하는 철학은 객체의 아래쪽에 있는 근원적인 것으로 객체를 치환한다.
하먼이 자주 드는 예시로 망치를 고려해 보자. 아래로-환원하는 철학은 예를 들어 물질적 구성요소를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망치는 철 원자, 탄소 원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 나아가 미시적인 소립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아래로-환원하는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구성요소야말로 실재라는 이름을 어울리는 것이고, 망치라는 객체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객체를 환원하는 두 번째 방법은 “객체는 무엇을 초래하는가”라고 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를 통해 객체는 그 결과(관계성과 상호작용 등)로 환원된다. 하먼은 이 전략을 “위로-환원”(上方解体, ovemining)이라고 부른다. 위로-환원하는 철학은 객체의 위쪽에서 발생하는 표층적인 것으로 객체를 치환한다.
다시 한번 망치의 예시를 고려해 보자. 위로-환원하는 철학은 예를 들어 관계성의 네트워크를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고립된 망치 자체는 의미가 없게 된다. 애초에 망치란 못을 박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집을 짓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그것은 나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위로-환원하는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전체적 목적의 네트워크가 존재하며, 망치는 이 네트워크의 한 마디로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철학자는 객체를 무효한 것으로 만들려 시도한다. 그들과 대항해서 어떻게 하면 객체에 자립성을 되찾아줄 수 있을까?
3. 객체는 파괴될 수 있다
여기서 하먼이 주목한 것은 “객체는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망치는 영원히 목적의 네트워크에 갇혀서 매끄럽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망치는 끊임없이 못을 박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망치는 때때로 망가진다. 망치는 돌연 뚝 하고 부러져 못을 박는 역할을 포기한다. 망치는 관계의 실타래를 뜯어내고 전혀 다른 측면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라는 객체 역시 관계성의 네트워크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당신은 “~의 남편/아내다”라던가 “~의 노동자다”와 같은 사회적 역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다발이 아니다. 당신이라는 객체 또한 이러한 관계의 실타래를 끊고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지하게 일하며 일을 맡기기 편한 노동자로서 매끄럽게 기능하던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상사를 때려눕히고 도주할지도 모른다. 이때 당신은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말하자면 '망가진 노동자'가 된다.
정리해 보자. 객체는 관계성의 네트워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정확히 “객체는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나타내는 것이다.
4. 객체는 관계에서 물러나 있다
그렇다면 왜 객체는 파괴될 수 있을까? 왜 객체는 관계의 실타래를 끊을 수 있는 것일까?
하먼에 따르면, 그것은 객체 그 자체가 관계에서 벗어난 측면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객체는 다른 사물에 대해 단지 한 측면을 엿보게 해줄 뿐이며, 언제나 잉여를 숨기고 있다. 객체는 소진할 수 없는 깊이를 남몰래 간직하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이다.
하먼은 이렇게 객체가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를 하이데거로부터 차용한 “물러남”(withdrawal, Entzug)이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남몰래 잉여를 간직하는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다(즉, 숨어 있다). 객체는 애초에 비관계적인 것이다. 하먼은 “모든 지각과 인과관계로부터 사물이 물러나는 것이야말로 객체지향 철학이 갖는 단 하나의 근본 원리이다”★1라고 말한다.
우리는 앞서(2장 끝에) “어떻게 하면 객체에 자립성을 되찾아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해답은 이미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결국, 철학자들의 환원 시도를 피하고 객체에 확고한 자립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물러남이라는 개념이다.
객체는 그 어떤 관점으로도 결코 소진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관계에서 물러난다.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던가 “무엇을 초래하는가”와 같은 것은 모두 객체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러한 한 측면만을 취해 그것으로 객체를 치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객체를 환원하려는 철학자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하먼은 객체의 이러한 존재 방식을 “블랙홀”에 비유한다. 우리는 결코 블랙홀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객체의 내부도 결코 만질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블랙홀에서는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다(“호킹 복사”라고 불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객체에서도 역시 소진할 수 없을 만큼의 성질이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객체 그 자체는 블랙홀 본체처럼 우리와의 관계에서 한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객체지향 존재론의 출발점에는 비관계적 객체라는 개념이 있다. 그러나 하먼은 여기서 더 나아가 관계로부터 물러난 객체들이 어떻게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작용을 가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객체지향 존재론의 (길고 난해한) 제2막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번 요점
■ 객체지향 존재론은 개개의 객체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 철학의 역사에서 객체는 환원되어 왔다.
■ 그런데 객체는 파괴될 수 있으며, 관계성의 네트워크에 갇혀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객체는 소진할 수 없는 깊이를 남몰래 간직하고 관계로부터 물러나 있다.
[주]
★1―Graham Harman, Guerilla Metaphysics: Phenomenology and the Carpentry of Things, Chicago: Open Court, 2005, p. 20.